이 책은 소설가 장강명이 쓴 르포타주(르포)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국' 이후, 바둑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꼼꼼한 취재와 여러 사람의 인터뷰로 정리한 글이다.
바둑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AI가 인간을 넘어선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 먹고사는 문제 외에는 모든 게 무용하다고들 하지만, 실은 전부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축구도 '그깟 공놀이'지만, 그 공놀이 때문에 전쟁도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둑이 그깟 돌놀이가 아니라 인생이고 예술이었던 것이다. 왜 과거형으로 썼냐면, 알파고 이후로 바둑이 아주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둑의 매력은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에서 비롯한 복잡성과 심오함에, 바둑 기사의 위엄은 그것을 직관과 계산으로 풀어내는 것이 있었는데, 알파고가 바둑의 모든 것을 계산해 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기풍이나 기세, 직관 같은 모호함은 전부 사라지고, 누가 누가 AI를 잘 따라 하냐로 실력이 결정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 바둑 기사들은 곤혹스러워졌다. 바둑의 트렌드를 정하는 전문가로서의 권위는 박살 나게 되었고, 선생으로서의 지위도 AI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선수로서 AI를 이기지 못함은 물론이었다.
장강명은 그런 일이 우리에게도 곧 벌어지지 않겠냐고 경고한다. AI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는 AI가 인간의 우위에 설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분야일 텐데, 이런 경우에 '인간이 더 잘한다'라고 주장할 수나 있을까? AI는 가치판단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을 텐데 말이다.
내가 열정과 헌신을 쏟아 영화를 한 편 찍어냈고, 나는 나의 작품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고 가정해보자. AI가 아무 의식 없이 수 분만에 생성한 수 백 편의 영화가 극장에 함께 걸리고 사람들이 AI의 화려한 작품들만을 찾는다면, 예술가로서 나의 자의식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 몇 끼를 더 굶다가 두 손 들고 헐레벌떡 AI로 영상을 찍어내든가, 자존심을 지키다 그냥 굶어 죽든가 둘 중 하나로 귀결될 텐데. 일단 기술이 세상에 풀리면, 개인이 그걸 거부하는 데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이기는 바둑이 곧 좋은 바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바둑판은 둘이서 그려나가는 조화로운 그림이고, 바둑 기사는 곧 예술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AI의 등장은 곧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었다. 일단 기술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면, 주관성을 띠던 부분은 점차 축소되어 관심 밖의 문제가 되고 실리에만 이목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좋은 삶에 대해서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좋은 삶에 대한 답은 수십 가지는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폐허가 된 사회에서 매트릭스 기계가 등장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기계 속에서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모두가 현실을 잊고 가상의 쾌락을 누리는 와중에, 나 홀로 자유의지를 갖고 죽음을 감수하며 기계와 싸우는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인생을 복잡하게 바라본 것 아닌가? 그냥 기계 속에서 쾌락 점수를 올리며 살아가면 되잖아'라고 생각을 바꾼 채, 가짜임을 알면서도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물며 현실을 잊기 위해 애쓰지 않을까?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기에, 발전된 기술의 위협 혹은 유혹에 쉽게 흔들릴 것이다. 우리의 주관성이나 자의적 기준이 실리(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 앞에서도 존재감을 지키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실리마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믿음은 깨어지지 않을까? 장강명은 명확하게 이를 부정한다. 키오스크는 종업원의 노동을 고객에게 무급으로 전가했다. 그러나 고객은 물론이거니와 종업원의 처우가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SNS는 우리의 거의 모든 시간을 타인과 연결시켰지만, 우리의 외로움과 불안은 오히려 커졌을지도 모른다. 더 많은 CCTV가 더 적은 범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프라이버시 침해로는 분명하게 연결된다. AI라고 다를 수 있을까?
일단 AI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완전히 넘어서고 난 뒤에는, 인간의 선택권은 사라지고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선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우리가 AI로 풀어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Google의 옛 슬로건은 'Don't be evil', 현재의 슬로건은 'Do the right thing'이라고 한다.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AI를 발전시키고 있는 그들은 무엇이 evil 하고 무엇이 right 한 지 제대로 논의한 채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장강명은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은 채 내려진 답은 그 자체로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그러나 알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답이 모호한 문제를 풀 때에는 일단 무엇이든 두드려보는 게 정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AI가 우리에게 분명한 실리를 가져다주면서도,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피터 틸의 질문이 생각난다. "남들은 모두 반대하지만 나 혼자만 믿고 있는 세상의 숨겨진 진실이 있는가?" 모두가 답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고, 그것이 누군가를 헤치지 않는 답이 존재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구글은 승부로서의 바둑을 혁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술로서의 바둑은 훼손했다.
책의 종반부에 흥미로운 주제가 있었다. 소설 「1984」 속 사람들은 감시와 형벌 속에서 고통받지만,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무한한 쾌락 속에서 고통받는다. 사람들은 현대 사회를 바라보며 조지 오웰 보다는 올더스 헉슬리가 더 나은 예측을 해냈다고 말한다. 장강명은 조지 오웰의 팬으로서, 21세기가 「멋진 신세계」에 가까워진 것은 사람들이 조지 오웰의 경고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전체주의를 막는 데 힘썼기 때문이라고 변호한다. 그러한 즉, 조지 오웰은 SF 작가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를 되새길 때,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는 모두 이를 알고 있다.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뾰족한 답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영역에서도 우리는 최대한 타당한 논리로써 기준을 세우고 미래를 그려야 하며, 우리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단이 우리 안에 자리잡지 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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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섬 그믐 대표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먼저 온 미래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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