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는 놀이, 대화, 언어, 전통, 역사, 영향사를 존재 개념으로 내세운다. 여기서 가다머가 생각하는 것은 귀속성의 사유이고 인간 유한성의 사유이다. 일례로, 대화는 주관적 인간이 대상화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화가 생기하여 참여자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유한성의 테제와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우위는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공유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의 있음의 근거를 존재라 부르고, 존재가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나 스스로는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근거의 사유와 다름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때 그에 따르면 존재란 존재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무엇’으로 물어질 수 없고, 존재를 언어적 실체로 규정해 온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이며, 언어의 궁핍으로 인해 존재는 존재자의 언어로 규정될 수 없다. 가다머의 고유성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론적 용어를 해석학적 술어로 번역했다는 것에 있다. 이해는 존재자 측에서 생기하는 사건이기에, 해석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이해에 관한 학문이다. 가다머는 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측에서 탐구를 진행했고, 그 출발점은 유한성으로부터 출발한 존재 경험에 있다. 이는 곧 존재를 역사나 언어 등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이며, 존재 자체와 존재의 의미의 구분이고, 존재 개념을 단지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로 단정하겠다는 결단이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존재는 시간 안에서 존재자와 함께 놀이하며 스스로를 형성하는 운동이다. 인간은 유한자로서 존재의 운동에 귀속되어 있지만, 존재 사유는 인간에게 달려있는데, 이때 인간의 존재 사유는 존재 자체가 아닌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존재자는 스스로와 관련된 모든 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깨달음이 인간의 약함의 경험, 즉 존재 경험이다. 인간은 자신을 능가하는 힘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경험할 뿐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약함에 대한 이념적 대응물로서, 그 약함에 덧붙여 강한 존재를 사유한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는 실체로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다만 우리가 존재자로서의 나보다 더 강한 존재자를 묻고, 그보다 더 강한 존재자를 물어 갈 때, 이 계열의 끝, 경계, 한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한계 개념이고 한계 규정인 것이다. 이렇듯 가다머의 존재 사유는 존재 자체의 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무력에 대한 것이며, 무력한 존재자의 타자로 사유된 존재의 힘에 대한 사유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존재 자체의 자신에 대한 사유, 그 사유 내용의 일방향적 고지를 말하는 후기 하이데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다머는 존재자에 관한 탐구를 포기하지 않고, 단지 이해의 경험이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기에 그 타자로서의 강한 존재를 한계 개념으로 사유한 것이다. 이에 가다머는 하이데거가 아닌 플라톤으로 돌아간다. 플라톤은 인간 유한성 및 존재의 우위, 이데아와 현상의 상호적 매개, 이해될 수 있는 존재에로의 제한의 측면에서 가다머와 유사성을 가진다. 플라톤의 지반 위에서, 플라톤에게 없는 사유 모델의 논리적 구조 및 주관주의 비판이 더해진 세속적 플라톤주의가 가다머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칸트와 딜타이, 그들의 배후에 있는 주관주의 형이상학이다. 주관주의 형이상학이란 주객 대립의 고착화이고, 그 대립에서의 주관의 항상적 우위이다. 사유하는 나로서의 주체는 세계의 중심에서 모든 존재자를 대상으로 삼아 사유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두 개의 의심할 수 없는 실체, 순수 사유로서의 자아와 연장으로서의 물체를 발견했고, 이는 곧 근대 주관주의 세계관의 두 축이 되었다. 또한 이 세계관의 산물이 방법적 탐구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과학이다. 방법의 과학론적 의미는 반복 가능성으로, 과학에서는 실체에 부착된 우연적 요소를 반복으로써 제거하고 결국 주관적 실체가 객관적 실체를 인식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가다머는 이러한 세계관에 반기를 들고 주관주의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소외란 매우 익숙하고 생소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 생소한 것으로 되어 버리는 상황인데, 가다머는 칸트의 주관적 미학 및 딜타이의 객관적 해석학을 각각 근대의 두 소외 – 미학적 의식의 소외와 역사의식의 소외라고 말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대상 자체에 있지 않고 주관의 감정에 관련되는 것으로, 아름다움의 문제를 주관의 의식의 상태에로 환원시킨다. 또한, 단지 취미 판단에 대한 이론을 전개할 뿐, 예술 경험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이 세계관에서 예술 작품은 천재적 작가의 내면을 고정시켜 보관한 객체이고, 관객은 그 내용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재현해야 한다. 이 과정이 가다머에게는 미적 의식의 소외인 것이다. 딜타이 이해 모델 역시 주관주의적 대립에서 시작한다. 텍스트는 저자의 내면을 담아내는 외적 기호이고, 해석자는 기호에서 출발해 기호가 지시하는 정신적 내면을 복원해야 하며, 이때 성공적 이해,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 해석은 반복 가능해야 하고, 이 재구성에서 해석자에게 실존 형성의 기반이었던 텍스트는 무관한 대립자가 되어, 역사의식의 소외가 발생한다.
해석학이란 타자 관계의 학문, 이해란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인데, 딜타이의 해석학은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를 무관하고 생소한 것 간의 대립, 즉 외적 관계로 본다. 가다머는 타자와 나의 무관함을 부정하고, 타자의 자립성을 인정한다. 해석학적 관계에서 타자란 침묵하는 객체가 아닌, 말하는 전승인 것이다. 텍스트는 나의 타자로서 나에 대한 것을 말하고 나는 그의 타자로서 그에 대한 것을 말한다. 텍스트는 해석자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해석자 역시 자신의 입장을 말하여 이것이 텍스트의 의미 내용으로 수용된다. 그러므로 이해란 대화이다. 즉, 이러한 이중적 형성 과정에는 하나의 종합이 있다. 변증법적 구조에서의 상호적인 매개는 자립적인 두 사람 간의 만남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해석학이 가야 할 길이다. 헤겔 변증법의 미시적 구조는 테시스와 안티테시스가 상호 매개되고 그 산물인 신테시스를 산출하는 과정이지만, 이 종합의 지속적 반복은 거시적 구조에서 원환 운동으로 나타나며, 결국 모든 변화를 자신 안에 보존해 되돌아온다. 가다머에게 타자 경험으로서의 이해란 미시적으로는 이해하는 일자와 이해되는 타자의 상호적 대화이며, 거시적으로는 원환 운동의 직선 운동에로의 전환이다. 가다머의 이해 이론에서, 유한자인 인간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존재의 운동에서 순환의 무한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일차원적 직선 운동으로 나타난다. 시간적 구조 안에서 과거성의 규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미래의 가능성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하이데거 해석학의 이해이고, 가다머 역시 이를 따른다. 이러한 이해에서의 과거 전체와 미래 전체의 상호적 대화라는 사건이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 융합이다. 이해 과정에서 존재의 지평과 존재자의 지평이 융합되고, 그 결과로서 하나의 거대한 지평이 새로 생긴다. 그리고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은 이 새로운 지평 안에로 소멸한다. 그러므로, 이해란 단지 잠정적으로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지평들의 융합의 과정이다. 이 운동의 상호적 매개에서 존재는 존재자에게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나, 존재자 또한 자신의 해석으로 존재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결국 존재는 자신의 연속성과 자기동일성 안에 그 영향을 지양해 소멸시킨다. 즉, 존재와 존재자의 대화는 다시 존재의 지평으로 귀결된다. 미시적 차원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상호성을 인정하기에 전통적 실체 형이상학은 아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존재의 우위를 인정하며 실체 형이상학의 큰 틀을 유지하는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은 실체 형이상학의 근대적 변형태인 주관주의가 망각한 인간 유한성에 부합하는 존재 사유를 제시한다. 실체 형이상학의 반대편에 있는 해체주의자들은 매번의 종합이 다시 존재의 운동에 병합되므로 철학적 해석학이 실체 형이상학과 다름없다 비판하나, 가다머는 실체 형이상학의 존재자를 초월한 존재의 단적인 자기 동일성과 달리 철학적 해석학은 존재와 존재자의 통일이고, 존재의 동일성은 존재자의 다름에 의해 매개된다고 말한다.
'TIL'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 Agent와 비즈니스 아이디어 (0) | 2025.02.12 |
|---|---|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0) | 2025.02.10 |
| 딜타이: 삶의 경향과 과학적 목표 간의 갈등은 해결되었는가? (0) | 2025.02.10 |
|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 (0) | 2025.02.10 |
| 「안티프래질」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