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프」
계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작년 봄부터 포커(=텍사스 홀덤)에 관심이 생겼다. 평소 한 분야에 꽂히면 깊게 파고들기보다 넓게 훑는 편인데, 이번에도 비슷했다. 진지하게 실력을 쌓기 위한 공부보다는 관련 콘텐츠나 트리비아를 탐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것 같다. 그래도 덕분에 포커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타인과 경쟁하는 대인(PVP) 게임보다는, 혼자서 탑을 쌓아 올리는 류의 게임에 더 익숙했다. 승부욕은 강했지만, 그것을 전략적 수 싸움보다는 순수한 피지컬이나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스포츠의 영역에서 해소해 왔다. 즉, 나는 확률과 불확실성이 개입하는 게임보다는, 내 능력과 투입한 시간만큼 정직하게 결과가 나오는 게임에 익숙했던 것이다. 내 삶의 궤적도 이와 비슷했다. 지금까지 중요한 기로에서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내린 기억이 별로 없다. 기댓값을 철저히 계산하기보다는 직관이 이끄는 대로, 때로는 선택을 유보하거나 타인의 조언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다행히 적성이 발휘되었거나 운이 따라주어 결과가 나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내 몸뚱이 하나로 냉혹한 사회에 나가야 할 텐데, 마인드는 여전히 솔로 플레이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부터가 다른 사람들 생각에 큰 관심이 없기도 하고, 불확실한 것에 대한 계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와는 달리 사회에서는 나 혼자만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성공을 보장받기 힘들다. 결국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의 약점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우물 안에서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더 넓고 멀리 보는 눈을 길러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커가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이건 끼워 맞추기 식의 사후적 접근일 수 있다. 지금은 그저 재미있어서 하는 게 가장 크고, 진지하게 공부한 시간도 길지 않으니 당장의 효용은 미미하다. 그러나 내 생각이 단순한 자기 합리화일지라도, 나는 언젠가 내가 포커를 잘하게 되면, 그건 단지 게임 실력이 늘어난 것을 넘어 내게 부족했고 갖기를 원했던 새로운 감각을 갖추게 된 증거가 될 거라 믿는다. 포커는 단순한 도박과는 결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가위바위보나 사다리 타기, 홀짝과 같은 단순한 내기부터 룰렛과 슬롯머신, 바카라나 블랙잭 같은 카지노 게임까지, 도박은 ‘재물을 걸고 우연에 의하여 재물의 득실을 결정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물론 포커도 도박 안에 속하지만, 엄연히 실력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도박과는 다르다.
포커는 가장 강한 족보를 가진 플레이어가 판돈을 전부 가져가는 제로섬 게임(레이크를 포함하면 마이너스섬)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승부는 족보를 확인하는 마지막 단계(=쇼 다운)까지 가지 않는다. 쇼 다운 이전에 네 번의 베팅 단계(=스트리트)가 존재하는데, 대게는 그전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포기(=폴드)한다. 서로의 핸드(패)를 알 수 없는 포커에서 승리의 핵심은 어쩌면 핸드 자체의 강함보다도, 상대에게 내 핸드의 강함을 믿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대 입장에서, 자신이 강하다고 주장하는 상대를 얼마만큼 믿어줄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는 언제나 게임 이론에 기반한 균형 지점이 존재하고, 우리는 상대의 액션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핸드를 예측하며 전략을 미세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포커는 말하자면 운과 실력이 적절히 조화된 게임이고, 이러한 점에서 운칠기삼으로 이루어진 우리 삶과도 꽤 닮아있다. 모든 정보가 명확히 드러나 운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바둑이나 체스, 모든 것이 랜덤하여 운의 영역만 존재하는 단순 도박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것이 바로 포커이다. 그래서 가위바위보와는 달리 포커를 '잘'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은 적어도 포커의 룰 안에서는 확률적 사고를 통해 최선에 가까운 의사결정을 수행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리아 코니코바가 쓴 「블러프」도 비슷한 관점에서 기획된 책이다. 마리아는 '포커를 통해 운의 속성과 그에 대한 통제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삶도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포커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전설적인 선수 에릭 사이델에게 배우며, 결국 WSOP(World Series of Poker) 메인 이벤트에까지 도전한다. 포커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만한 흥미로운 여정이다. 마리아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포커를 배우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이론적으로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포커를 통해 체득한 실천적 교훈 역시 책 구석구석 잘 녹아들어 있다.
마리아는 포커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훌륭한 게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포커는 불확실성을 단지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감각으로 수용하게 돕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불확실성에 대한 베팅은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진단을 내릴 때, "기침이 잦고 열이 나는 것으로 보아 감기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관점에서 의사는 그렇게 단언해서는 안 된다. 증상과 질환은 확률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의사에게 자신의 진단에 전 재산을 걸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진단에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며 발병 가능성을 따져볼 것이다.
이런 비슷한 일이 포커에서는 매 순간 반복된다. 정보가 불완전하기에 확실한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얼마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할지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거의 즉각적으로 도출되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복잡하기에, 잘못된 선택이 곧바로 내 손해로 연결되는 경우가 그리 잦지는 않다. 그러나 포커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택을 잘하면 남의 돈을 뺏을 수 있고, 잘못하면 내 돈을 뺏긴다. 불완전한 정보만 주어진 채 선택을 강제당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매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최선의 선택을 해도 최악의 결과가 뒤따른다. 포커에 '마땅한 결과' 같은 건 절대 없다. 커뮤니티 카드 없이 각자의 핸드만 존재하는 프리 플랍(Pre-flop) 단계에서, 내가 포켓 에이스(AA, 최상의 핸드)를 들고 있다면 누군가의 올인에 당연히 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거의 모든 핸드에 대해 80% 이상의 승률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고,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과신해서는 안 된다. 포커 테이블은 무한한 독립시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적은 시행 횟수에서는 불확실성에 의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AA를 들고도 불운하게 두세 번 연속으로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확실성 앞에서 체념하고 행운을 빌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된다. 운은 그저 통제할 수 없는 운일 뿐이다. 단기의 변동성은 운에 의한 것일 뿐, 실력만 향상된다면 대수의 법칙에 따라 완만한 상승 곡선이 그려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통제 가능한 영역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포커 테이블 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뿐이므로, 우린 그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마리아의 스승 에릭 사이델은 포커의 목적이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불확실성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운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 집착하는 대신 통제 가능한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less certainty, more inquiry'. 포커를 통해 우리는 확신은 내려놓고, 합리성을 토대로 신중하게 탐구하는 자세를 기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승부에서 단순히 돈 만을 거는 게 아니다. 우리의 감정과 자존심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패배는 더 쓰라리고, 그렇게 남은 감정이 이후의 선택을 왜곡하기도 한다. 감정은 때때로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만약 패배가 우리의 실수 때문이었다면, 그로 인한 부정적 감정이 미래에 비슷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선행되어야 할 것은 감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단순히 어떠한 감정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한다면 좋은 선택이 지속될 수 없다. 즉, 감정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돕지 못한다면, 그것을 행동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승리에 필요한 조건은 위빠사나 명상이 수행자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라는 것이다.
에릭 사이델 역시 집중에 대한 측면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상대에 대한 집중 역시 포함한다. 상술했듯 포커에서 승패는 마지막에 가서야 정해지지만, 그전에 저마다의 예측과 믿음에 따라 얼마든지 승부가 정해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상대의 액션을 통해 그가 무엇을 말하고, 또 말하지 않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를 통제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나의 감정이건 상대의 행동이건 의사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서라면 잘 모아서 정리하고, 그렇지 않다면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결론 부분에 이르러 마리아는 '기술만으로 언제나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게 최고의 블러핑이라 말한다. 결과는 언제나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최선의 집중 속에서 통제 가능한 사고와 결정 과정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불운이 따르더라도, 좋은 의사결정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메타인지와 훈련이다. 이는 인생 전반에도 적용할 수 있는 태도로 보인다. 포커가 인생과 닮아 있는 만큼, 그 해결책도 비슷한 듯하다.
그러나 인생과 포커는 분명 다르다. 인생은 포커보다 더 높은 위험과 보상을 동반한다. 인생은 말 그대로 인생을 건 게임이다. 다시 벌 수 있는 돈과 달리, 시간은 가장 희소하고 유한한 자원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승부를 걸 수 있는 횟수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의 실수가 자꾸 생각나고, 앞으로 남아 있는 기회가 점점 달아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인생을 포커처럼 봐야 하는 것 같다. 매 순간 깨어 있으려 노력하며, 최고의 기댓값을 추구해야 한다. 통제 불가능한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통제 가능한 선택과 과정에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좋은 선택들을 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사는 게 정답인 것 같다.
책을 읽은 지는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벌써 내용을 많이 까먹었다. 메모에만 의지하려 쓰다 보니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서 두서가 없다. 책 자체는 정말 즐겁게 읽었다. 두고두고 다시 읽을만한 책이다.
블러프 | 마리아 코니코바 - 교보문고
블러프 | 1년 만에 포커 챔피언이 된 심리학자가 말하는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더 나은 선택을 내리는 법! ·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와이어드〉 선정 올해의 책 · 전 세계 13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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