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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화국 선언」

Eric Ju 2025. 10. 24. 00:46

팔란티어 창업자이자 현 CEO 알렉스 카프가 현대 사회, 특히 미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쓴 책이다. 빅테크 창업자가 기술이나 비즈니스에 대해서 쓴 글은 많지만, 정치나 철학에 대해 쓴 글은 많지 않다. 써봤자 손해일 확률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팔란티어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기업이고, 카프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유감없이 제시한다.

다음은 책에 대한 전반적인 요약이다.



알렉스 카프는 이 책에서 1900년대 중반 미국의 발전을 견인했던 ‘기술공화국’ 정신의 재건을 주장한다. 미국이 민간 기술 산업과 정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다시 한번 거대한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에 따르면, 미국의 초기 정치가들은 과학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과학이 지금처럼 분업화되지 않았고 신생 학문 분야가 많았기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다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잦았다. 이처럼 정치와 과학이 밀접했던 전통은 세계 대전 당시의 과학 발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술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미국 정치가들은 전후에도 그 발전이 지속되기를 바랐고, 이는 국가가 주도하고 학계가 실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이어져 미국의 기술 우위를 확립했다. 카프는 어떤 정치 체제든 신뢰와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공공 부문의 지속적인 성과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기술 우위가 민주주의 진영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카프는 본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앞세운 서구의 정치 체제가 실리콘밸리를  육성했다고 보지만, 현대의 스타트업들은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 점차 국가 정체성을 폐기하고 변덕스러운 소비자에게만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미국의 정신이 변화해 온 과정을 설명하며 ‘야유하는 자의 거부권’이라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발언이 폭력적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즉 논란이 두려워 스스로 입을 막는 상황을 의미한다. 진정성 있는 신념이 가차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발언은 위축된다. 결국 개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에 대한 목소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만연해지고, 이는 중요한 도덕적 논쟁의 종말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도는 더 큰 문화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카프에 따르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역사의 서술을 곧 권력의 행사로 규정하면서, 발화의 내용보다 주체가 중요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정체성의 기반이던 서양 문명의 거대 서사는 그 자체로 공격적이며 허구적이라는 비판 앞에서 힘을 잃었다. 카프는 이 거대 서사의 해체가 절대적 가치의 부재로 이어져 모든 것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낳았으며, 이는 비폭력주의나 평화주의가 아닌 ‘철학의 공동화’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교육이란 자신의 신념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기능이 실패하며 우리의 정신이 악의를 가진 타인에게 도구화되기 쉬운 상태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해체주의는 집단적 표류와 공동체 정신의 거부로 이어졌고, 문화적 담론은 사생활에만 집중되어 시시하고 사소한 것으로 전락했다. 결국 진지한 공적 담론이 사라진 자리는, 자신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흐름은 기술 산업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신념 없는 리더를 양산했으며, 이러한 세속적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개인은 오히려 타인에게 이용당할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카프는 이 모든 흐름을 ‘능력 있는 기술자들이 소비자를 위한 제품에만 천착하게 된 역사’로 요약한다.

그러나 카프가 실리콘밸리의 모든 면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링 사고방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정수라고 평가한다. 린다 무어가 새로운 둥지를 찾는 꿀벌 무리를 연구한 결론을 인용하며, 거대 조직이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할 때 중앙 통제 없이 자율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정교하게 협업하면 훨씬 효과적이라고 역설한다.

나아가 카프는 키스 존스턴의 즉흥 연기론을 빌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스타트업에서도 이론이 아닌 관찰에 기반한 실용적 시도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존스턴은 즉흥 연기를 ‘지위’의 협상으로 설명했는데, 카프는 이 개념을 확장하여 조직 내 유연한 지위 체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수준급 오케스트라처럼 개개인의 전문성과 창조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조직의 구조는 존재하되 그것이 경직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역량의 기반에는 외부의 집단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하는 ‘불복종 본능’, 즉 ‘사회적 청각 장애’가 자리 잡고 있다.

카프가 설명하는 실리콘밸리 문화의 핵심 동력은 ‘극단적 실용주의’이다. 이는 섣부른 판단이나 주관을 유보한 채, 증거에 맞는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정답을 찾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는 목표에 대한 맹목적 추구나 남을 의심 없이 좇는 모방이 아니라, 확률론적 접근과 휴리스틱 사고를 통한 전략을 탑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Whys’ 전략도 좋은 예시이다. 이러한 주장은 언뜻 전반부에서 거대 서사의 종말을 비판한 것과 상충되어 보일 수 있으나, ‘목표는 명확히 하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최대한 유연해야 한다’는 논지로 읽으면 보다 정합적이다.

카프가 보기에 이미 신념을 잃은 실리콘밸리의 윤리관은 ‘기술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낙관론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곧 개개인을 원자적 존재로 보는 좁고 얕은 공리주의적 관점과 다름없다. 그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적대 세력의 발전 앞에서 우리가 다시금 ‘문명은 무엇이며,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시장 승리주의’에 투신하는 대신, 도덕과 기술의 유관성을 인지하며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가 이처럼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기조로는 서방 자유 진영의 패권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인공지능을 소비재에 적용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적대국은 군사적 활용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지난 반세기의 평화는 결국 핵이라는 강력한 ‘경성 권력(Hard Power)’ 덕분이었으며, 규칙이 유지되려면 그것을 강제할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술은 권력과 결합할 수밖에 없고, 패권 경쟁은 언제나처럼 제로섬 게임의 형태를 띨 것이다. 카프는 경찰 지원 소프트웨어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예로 들며, 현재의 미국 사회가 미지에 대한 두려움 탓에 기술의 오용 가능성에 대한 담론 자체를 차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기술 도입의 타당성을 논의하기도 전에, 일말의 부정적 가능성에 대한 극단적 반응이 '그 기술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본질적 논의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카프는 현대 시민들이 오랜 평화에 둔감해졌다고 본다. 확실히 우리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여러 기술의 도입을 주저하는 사이, 중국은 CCTV로 막대한 데이터를 축적해 AI 기술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빗대어 봤을 때, 첨단 기술 경쟁은 이미 '치킨 게임'의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카프는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를 돛대에 묶은 오디세우스의 일화를 인용한다. 이는 창업자가 자신만의 관점에 헌신하며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목소리에 맞춰 사람들의 자잘한 불편을 해결하는 데 몇 년을 바치는 대신,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는 더 위대한 목표에 헌신하라는 것이다. 또한, 카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오너십에 기반한 문화가 정착되어야 하며, 조직의 성과에 자신의 미래를 자발적으로 베팅한 이들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정신은 지나친 관용과 극단적인 해체주의로 개인의 가치를 지키는 데 몰두한 나머지 공동체의 가치를 잃어버렸고, 최첨단 기술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마저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욕구를 해결하는 데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사이 적대 세력은 기술 격차를 좁히며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이제 서구는 단기적인 시장 논리와 여론의 소음을 넘어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문명적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는 '기술공화국'의 정신을 부활시켜 위대한 혁신을 위한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상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알렉스 카프의 핵심적인 아이디어인 것 같다. 책의 내용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해체주의나 회의주의가 옳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은 알 수 없고, 정확한 판단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지금도 그런 태도가 맞기는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태도로 일관하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이 자신의 독단적인 방황에 대해 성찰하고, 자신이 처한 지역의 지형을 탐색하여 앞으로 더 확실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정류지이나, 영구적인 거주를 위한 주거지는 아니"라고 했다. 결국 길의 중간에서 영원히 멈춰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요즘의 세계정세에서는 더욱 그런 듯하다. 결국 우리는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은 미친듯이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한국이 뭐라고 고고히 중립국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미국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말이다. 모두와 아름답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은 부분적으로라도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적 뿐만이 아니다. 진실은 취사선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인데, 자신의 믿음을 진리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기는 많다. 어쨌든 그럼에도 자기 생각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약점 하나라도 잡으면 이때다 싶어 온몸을 물어뜯는 분위기 때문인지, 무슨 의견이든 함부로 입 밖으로 내기 어렵다. 온 나라가 서로의 신변잡기에만 몰두하게 되면서, 가장 저열한 사람들만이 스피커를 자처하고 나서는 듯하다. 암울한 현실이다. 

 

나라도 걱정이긴 한데, 지금은 내가 제일 걱정이다. 몇 년째 표류중인 것 같기도 하다. 결국은 어디든 방향을 잡아 달리고 나서, 수정 또 수정해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술공화국 선언 | 알렉스 카프 - 교보문고

기술공화국 선언 | 실리콘밸리의 철학자 알렉스 카프가 전하는 미래에 대한 성찰과 제언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와 법률 고문 니콜라스 자미스카가 함께 쓴 《기술공화국 선언》은 기술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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