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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effler의 사후 세계(Afterlife)에 대한 설명

Eric Ju 2025. 6. 14. 14:13

1. Afterlife

Scheffler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사후 세계(afterlife)의 존재, 즉 개인이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도 의식 있는 존재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비표준적 의미의 사후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즉 한 개인이 죽은 뒤에도 다른 이들이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전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데, 이러한 가정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탐구하는 것이 그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이다.

 

Scheffler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confidence)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계속 우리에게 중요하게 남도록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사후 세계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놀라운 특징들을 드러내는데, 특히 어떤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거나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대한다(valuing)는 것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후 세계의 역할은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한 사고에서 시간이라는 깊지만 포착하기 어려운 영향력을 밝혀주며, 우리의 삶의 시간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전략을 탐구할 수 있는 편리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여기서, 어떤 것을 소중히 하는 것(valuing)과 그것이 가치 있다(valuable)고 믿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구분이 있다. 소중히 대하는 것에는 대상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밖의 요소들도 포함된다. 소중히 하는 것은 인지적, 숙고적, 동기적, 정서적 차원을 모두 갖춘 태도적 현상이다.

 

2. Doomsday scenario: human valuing

만약 당신이 정상적인 수명을 누리고 죽은 지 삼십일 뒤,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이러한 앎은 당신이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당신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가 종말 시나리오에 직면했을 때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반응 중 하나는 완전한 무관심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테니 내게는 털끝만큼도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죽음 이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지 않다. 이는 다시 우리 자신의 경험 이외의 것들도 우리에게 중요함을 함의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사후 사건이 우리의 경험은 아니더라도 장차 그 사건을 숙고하는 과정은 우리의 경험이며 만약 그 숙고가 우리를 괴롭힌다면 그 괴로움 또한 우리의 경험에 속한다고 이의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핵심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경험만이 우리에게 중요함을 입증하지 않는다. 사후 사건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괴로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가치에 대한 비경험주의(nonexperientialist)적 해석을 뒷받침한다. 즉 소중히 대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경험만이 아니라는 해석을 지지하는 것이다.

 

종말 시나리오에 대해 우리가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또 다른 반응이 있다. 지구 파괴의 긍정적·부정적 결과를 따져 보며 그것이 총합적으로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려고 숙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경우 지구 종말의 부정적인 점이 긍정적인 점을 능가한다는 판단이 즉각적으로 자명하게 나올 수도 없다.

 

겉보기에는 최소한 우리가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소중히 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태도에 비결과주의(nonconsequentialist)적 차원이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소중히 대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최선의 결과가—그것이 무엇이든—실현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우할 이유를 그것의 좋음을 만드는 다른 속성에서 찾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돌연한 죽음이나 소중히 여기던 것들의 갑작스러운 상실과 파괴에 대해 슬픔, 비애, 기타 다양한 고통을 겪는다. 우리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비경험적·비결과주의적 차원과 나란히 존재하는 가치에 대한 보존적 차원(conservative dimension)을 부각시킨다.

 

어떤 것을 소중히 한다는 것과 그것이 유지되거나 보존되기를 바란다는 보수적 태도 사이에는 개념적 연결이 존재할 수 있다. 보통의 상황, 즉 종말이 아닌 조건 아래에서 자신의 죽음을 숙고할 때 느끼는 애잔함의 일부는,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이유들에 응답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직접 보존하거나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없으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미래에 다른 이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지금 조치를 취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 또는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종말 시나리오는 그러한 모든 희망을 산산이 깨뜨리며, 이로 인한 정서적 결과는 그 시나리오에 직면한 사람에게 심대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3. Doomsday scenario: projects and plans

지금까지, 우리는 지구의 임박한 파괴 전망이 우리에게 슬픔, 비애, 고통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만 논의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종말 시나리오에 대한 우리의 보다 일반적인 반응에 조금 더 집중하고자 한다.

 

그 전망이 이후 우리의 동기와 삶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줄지 역시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프로젝트와 계획에 어느 정도 계속 헌신할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들은 앞으로도 계속 추구할 만한 것으로 보일 것인가?

 

첫째, 그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덜 강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참여할 아무런 이유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둘째, 그에 대한 정서적 투자가 약화될 수 있다. 예컨대 프로젝트에 예전만큼 열정이나 기대를 느끼지 못하고, 방해받아도 그만큼 좌절하지 않으며, 잘 풀려도 그만큼 기쁘지 않고, 잘 풀리지 않아도 그만큼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극단에서는 정서적으로 분리되거나 무관심해질 수 있다. 셋째, 그것들이 가치 있는 활동이라는 믿음 자체가 약화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암 치료법을 찾으려는 프로젝트를 살펴보자. 이 프로젝트가 취약한 이유는 최소 두 가지다. 첫째, 궁극적 성공이 먼 장래에야 달성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미래를 단축하는 종말 시나리오는 그러한 치료가 발견될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 둘째, 이 프로젝트의 주된 가치는 결국 질병을 치료하고 그로 인한 죽음과 고통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에 있다. 그러나 종말 시나리오는 설령 즉각적인 성공이 있더라도 그 혜택이 아주 짧은 기간만 제공됨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에서는 과학자들의 연구 동기가 크게 약화될 수 있다.

 

이는 프로젝트가 특히 취약해지는 경우가 (a) 궁극적 성공이 먼 미래에나 달성될 것으로 보이거나, (b) 그 가치가 장기간에 걸쳐 다수에게 제공할 혜택에서 파생될 때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둘 중 하나라도 충족하는 프로젝트와 활동은 수도 없이 많다.

 

종말 시나리오가 다른 유형의 프로젝트에 미칠 영향은 이보다는 불분명하다. 예컨대 많은 창작·학술 프로젝트는 암 치료법 찾기처럼 분명한 실용적 목적은 없지만, 실제 혹은 가상 청중이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수행된다. 종말 시나리오는 청중이 즉시 사라짐을 뜻하지는 않지만, 오래 남아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작이나 학술 프로젝트에 대해서, 활동 자체가 필요조건이며 청중은 충분조건일 수 있지만 필요조건은 아닐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논의한 유형의 프로젝트뿐 아니라 인간 삶의 일상적 측면도 매력이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출산 활동을 생각해 보자. 자녀가 부모의 죽음 후 늦어도 삼십 일 안에 죽을 것임을 안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자녀를 갖고자 할까? 자녀 양육과 관련된 광범위하고 다양한, 삶을 바꿀 만한 활동에도 덜 동기부여될 것이다.

 

대조적으로, 종말 시나리오에 가장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개인적 안락과 쾌락에 초점을 맞춘 활동일 것이다. 다만 종말 조건하에서 무엇이 안락하고 즐거울지는 필시 명확하지 않다.

 

결국 종말 시나리오에 직면한다면 많은 프로젝트와 활동이 더 이상, 혹은 이전만큼,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동일한 프로젝트와 활동의 매력이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망만으로는 이렇게 약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죽음만으로는 중요도가 줄어들지 않는 프로젝트와 활동도 모두가 곧 죽을 것이라는 전망에서는 중요도가 줄어든다. 따라서 사후세계를 우리 죽음 이후에도 지상의 인간 생명이 계속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후세계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지속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사후세계는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하도록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 없이는 지금 우리 삶에서 중요한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하게 될 것이다.

 

4. Doomsday scenario: personalizing our relation to the future

이제 종말 시나리오의 한 특징, 곧 우리가 사랑하거나 아끼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갑작스럽게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보이는 더 구체적인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말 시나리오의 핵심은 우리 자신이 죽고 30일 뒤 살아 있는 모든 사랑하는 이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서 그 죽음을 목격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 이르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도 최소한 몇몇 소중한 이들이 계속 살아 있기를 왜 바랄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고 그중 일부는 다시 직관적이다. 앞서 언급한 '너무 이른 죽음'이라는 고려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우리와 그들 모두 충분히 나이가 들어 어떤 죽음도 특별히 이르다고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적어도 일부 소중한 이보다 먼저 죽기를 선호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죽으면 그들이 먼저 죽었을 때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 해도, 이런 괴로움을 우리가 겪기보다는 그들이 겪는 편을 은연중에 바라게 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 우리가 죽을 즈음, 우리가 사랑하거나 깊이 아끼는 이들이 살아 있으며 그들과 가치 있는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의 죽음은 그 관계들을 끊어 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관계적 단절(relational disruption)이 죽음에 수반된다는 사실은 어떤 위안 또는 바람직함을 내포한다고 보인다.

 

죽음에 그러한 단절이 수반된다는 전망이 사후세계, 곧 우리가 없는 뒤에 전개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사후 세계를 더 개인화된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진행 중인 사회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사회적 정체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 죽음 이후에도 살아갈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비록 우리가 실제로 그 세계를 누리지는 못해도, 미래 사회 속에 우리 몫의 자리가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 태도가 비합리적이라는 평가는 Scheffler가 반박해 온 경험주의적(experientialist) 관점에 의존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말 시나리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인간의 가치평가 현상이 지니는 비경험주의적, 비결과주의적, 보존적 차원을 부각한다.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경험만을 신경 쓰지 않으며, 최선의 결과가 실현되는 것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시간이 흐르더라도 유지·보전되기를 원한다. 둘째, 사후세계는 우리에게 여러 방식으로 중요하다.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사후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confidence)은 지금 여기서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하도록 해 주는 조건이다. 셋째, 종말 시나리오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 특히 미래와의 관계를 개인화하려는 충동을 부각한다.

 

5. Doomsday scenario: group-based responses

이제 이러한 잠정적 결론들을 좀 더 확장해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죽음은 우리의 가치 보수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언급했듯이, 죽음은 우리와 시간 사이의 관계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 경우,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이 우리 죽음 이후에도 그 가치들을 유지하도록 행동하게 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 두 번째 경우, 우리가 우리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맺는 가치 있는 개인적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죽음 이후 미래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대응은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집단 기반의 대응에 참여함으로써 이를 보완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그 가치들을 뒷받침하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헌신하는 가치들을 구현하는 전통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은 그 가치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노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미래와의 관계를 개인화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집단 기반의 형태를 띤다. 많은 사람들은 대다수 구성원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함에도 공동체적 또는 국가적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러한 소속감을 소중히 여긴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울 만큼 강력하고 위안이 되는 생각이다. 이는 적어도 사회적 관점에서 미래 세계가 완전히 낯선 곳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제공한다. 

 

미래와의 관계를 개인화하기 위한 집단 기반 전략은 특정 개인들의 생존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명백한 이점을 제공하는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집단은 어느 개인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말 시나리오는 개인적 해결책뿐 아니라 집단 기반해결책도 마찬가지로 좌절시킨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에게는 특정 전통에 연관되어 정의되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중 일부는 전통을 강화·기여·풍부화·유지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또 다른 프로젝트들은 전통 자체가 제공하는 선택지를 단순히 받아들여 실행하는데, 이러한 선택지는 오직 전통의 관행·역사·자기 이해라는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유형의 프로젝트들은 종말 조건에서도 동기적 매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많은 전통 의존적·집단 의존적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 덜 중요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목표 자체가 특정 전통이나 집단의 장기적 생존 혹은 번영에 달려 있거나 이에 의존하는 프로젝트는, 이제 사전에 실패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6. The Children of Men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사후세계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결국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사후 생존에 대한 관심으로만 환원된다는 인상을 낳거나 강화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미래와 개인적 관계를 맺도록 해 주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사랑하는 특정 인물들, 혹은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특정 집단이나 전통이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인 듯하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사후세계는 오로지 그 사람들만의 사후세계라는 결론을 유혹적으로 이끌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성급하다. 사랑하는 이들이 조기에 사망하지 않는다 해도, 인류 전체의 임박한 소멸은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P. D. 제임스(P. D. James)의 소설 『칠드런 오브 맨(The Children of Men)』이 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다. 이 소설은 25년 넘게 신생아가 태어나지 않아 인류가 불임(infertility)에 빠졌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마지막 세대가 점차 사라짐에 따라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우리가 제임스의 불임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며 인류 소멸 전망에 대한 반응을 예측한다면, 그 반응에는 사랑하는 이의 조기 사망에 대한 감정이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류 절멸의 전망을 불안하거나 더 심각하게 느낀다면, 그 상상된 반응은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에 대한 특정적 관심과는 무관하다.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걱정은 단지 인간 사후세계의 부재가 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불임 시나리오는 특정 인물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기 때문에, 종래의 종말 시나리오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한 가지 사실을 부각한다. 우리가 논의해 온 재앙 시나리오들에 대한 반응에서 특정적 요소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동시에 또 다른 강력한 요소—곧 ‘인류 그 자체’의 임박한 종말이 우리에게 미치는 충격—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의 모든 묘사가 설득력이 있다면, 지구상의 삶이 곧 끝날 것이라는 인식이 그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는 활동 범위를 크게 넓혀 줄 것임을 시사한다. Scheffler는 이미 그 전망에 의해 위협받을 여러 유형의 활동을 지적했다.

 

그러나 제임스의 서사는 불임 세계에서 그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는, 덜 명백한 활동 유형도 존재함을 시사한다. 자연의 향유, 문학·음악·시각 예술의 감상, 지식과 이해의 성취, 음식·음료·성 같은 욕구적 쾌락조차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문학과 예술 감상,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획득, 그리고 욕구적 쾌락을 좋은 삶(good life)의 구성요소로 이해한다. 이는 이러한 선(goods)이 인간 삶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일정한 관점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임스의 추측은 ‘인간 삶 전체’라는 우리의 개념이 그 자체로 진행 중인 인간 역사, 즉 시간적으로 확장된 삶과 세대의 연쇄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암묵적 이해에 의존할 가능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