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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 인과

Eric Ju 2025. 5. 14. 18:37

심성 인과는 마음이 물리적 사건이나 다른 심적 사건에 영향을 주고받음을 의미한다. 지각 현상은 물심 인과를 함축한다. 눈앞의 나무를 본다는 것은 외부 대상을 지각하고, 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심성 인과가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인과적 다리 없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실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도 한다. 수동적 관찰과 달리, 우리는 실험 조건을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결과를 관찰한다. 이는 실험이 심물 인과를 전제하며 심물 인과 없이는 불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심심 인과 역시 인간 지식에 본질적인 것이다. 우린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추론해 낸다. 추론은 믿음이 다른 믿음을 산출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따라서, 심성 인과는 인간의 지각, 추론, 행동, 그리고 지식을 설명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이다.

 

이때, 심성 인과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특히, 마음은 어떻게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비물질적인 정신적 상태, 즉 심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이 두 실체로서 서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에 대해 마음과 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없지 않느냐고 물었고, 데카르트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라이프니츠, 말브랑슈, 스피노자 등은 부수현상론을 내세웠다. 심적 사건은 물리적 과정의 결과이지만, 그 자체로 어떠한 다른 것도 야기하지 않아서, 다른 물리적 사건 혹은 심적 사건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심적 사건들로부터 도출해 낸 규칙성들은 진정한 인과적 연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실제 인과 과정의 반영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20세기 초의 창발론자였던 새뮤얼 알렉산더는 부수현상론이 참이라면 마음은 인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그것을 실재하는 무엇이라 받아들일 이유조차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부수현상론자가 마음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수현상론은 심물 인과와 심심 인과를 부정할 뿐, 물심 인과는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가장 엄격한 부수현상론의 경우에는 마음을 비인과적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 텐데, 이 경우에 마음은―알렉산더가 말했듯―폐기되어 비존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시적으로 지지되지는 않는다. 상술했듯, 심성 인과는 행위자 및 인식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것들을 지각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심성 인과가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심신 문제에 대한 어떤 견해의 설득력은 심성 인과에 대한 해명의 효과에 의존한다.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심성 인과의 문제는 두 종류의 실체가 아닌 두 종류의 사건들을 통해 규정된다. '심적 속성의 예화 혹은 사건이 어떻게 물리적 속성의 예화 혹은 사건을 야기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러한 심성 인과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것은 '원인'과 '이유'에 대한 논쟁이었다. 자연 현상을 설명할 때 우리는 '원인'을 끌어들이고, 행동을 설명할 때는 '이유'를 언급한다. 이유에는 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이유에 의한 행위의 설명은 명제 태도를 설명하는 지향적 설명이며, 상식 심리학적 설명이다. 이때, 헴펠은 이유가 곧 원인이라 말했다. 그의 '포괄법칙 모델(covering-law model)'에 따르면, 설명은 어떠한 현상이 법칙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 역시 심리와 연결되는 법칙이 있다. 반대로 딜타이와 W. 드레이는 이유는 원인이 아니라 말한다. 행위에 대한 설명은 원인에 의한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 이유에 의한 '합리적'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데이비드슨은 이 갈등의 봉합을 시도했다. 합리적 설명도 인과적 설명 안에 포함되지만, 인간 행위에 대한 심리학적 법칙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이유는 행위의 원인일 경우에만 행위를 설명한다. 즉, 주어진 행위에 대해 여러 이유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오직 그 행위의 '원인이 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심성 인과의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연결하는 법칙의 존재 여부이다. 심물 사이의 인과적 연결의 보증에 필요한 심물 법칙은 존재하는가? 데이비드슨은 '심적인 것의 무법칙론'을 통해 그러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심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연결하는 엄밀하고 예외 없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과 관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칙이 필요하다. 인과적으로 연결된 사건들은 법칙을 예화 하거나 그것에 포섭되어야 한다. 데이비드슨은 자신의 주장을 믿음, 욕구, 의도 등의 명제 태도로 제한한다. 예를 들어, 늦지 않게 집으로 귀가하고 싶은 마음과 같은 심적 상태에 대한 신경 상관자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심성이 두뇌에서 벌어지는 것에 의존하므로 심물 법칙이 명백히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을 최소한 약화시킨다. 그러나, 인과 관계가 있으려면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연결하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심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반박되지는 않는다. 데이비드슨은 인과에 대한 법칙적 개념과 심물 무법칙론, 그리고 심물 인과는 모두 양립가능하다고 말한다.

 

우선, 그의 심물 무법칙론은 믿음과 욕구와 같은 지향적 상태의 어떤 '합리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주체에게 귀속되는 상태의 전체 집합은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정합적일 것을 보증하는 원리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이다. 화자의 믿음 체계는 전체적으로 정합적이어야 하며, 명백한 논리적 함축 하에 닫혀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합리성 및 정합성의 요구가 데이비드슨이 주장하는 심적인 것의 본질이며, 이러한 요구는 심적인 것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그런데, 물리적 영역은 이러한 요구의 규제 아래에 있지 않고, 따라서 심물 법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믿음과 두뇌 상태를 연결하는 법칙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믿음 B가 발생할 때마다 신경 상태 N이 발생한다면, 합리성 원리의 지배와 상관없이 주체에게 믿음을 하나하나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믿음 B를 갖고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신경 상태 N의 발생 여부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귀속은 더 이상 합리성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되고, 신경 상태와 법칙적으로 연결되어 믿음은 물리 이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에 의하면 합리성 원리가 심성의 본질이므로, 합리성 원리를 벗어날 때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게 된다. 즉, 심적인 것은 물리적 기저에 법칙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법칙 없이 어떻게 심물 인과를 설명하냐는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데이비드슨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통해 심물 무법칙론 하에서의 심물 인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선, 인과적 연결은 반드시 일반 법칙을 예화하거나 그것에 포섭되어야 한다. 어떠한 심적 사건 m이 물리적 사건 p를 야기할 때, 이는 어떤 사건 유형 CE가 있어, mC에 속하고 pE에 속하며 사건 유형 CE를 연결하는 법칙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는 개별 사건이 어떤 유형에 속할 때에만 법칙에 의해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물 무법칙론은 심적 '유형'과 물리적 '유형'을 연결하는 법칙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적 사건 m이 물리적 사건 p를 도출할 때 그들 각자가 속한 유형 CE는 물리적 유형이어야 한다. 물리적 법칙이 심물 인과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심적 사건 m이 속하는 유형 C가 심적인 것이 아닌, 물리적 유형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m은 물리적 사건인 것이다. 데이비드슨은 한 사건이 어떤 유형에 속하느냐에 따라 심리적 또는 물리적 사건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심적 유형에 속하면서, 동시에 물리적 유형에 속할 수 있다. 개별 사건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이비드슨의 논증은 인과 관계에 포함되는 모든 심적 사건들, 즉 존재하는 모든 심적 사건들이 결국 물리적 사건임을 설명한다.

 

데이비드슨의 설명 아래에서, 세계는 오직 물리적 대상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물리적 사건은 심적 사건일 수 있다. 법칙들이 물리적 유형 및 속성들을 다른 물리적 유형 및 속성들과 연결 짓고, 이러한 법칙이 개별 사건들 사이의 인과 관계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모든 인과 관계는 물리적 법칙에 근거한다. 

 

이러한 무법칙적 일원론이 부수현상론 이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할 수 있다. 데이비드슨의 논증을 따르면, 모든 인과적 일은 물리적인 법칙이 수행해야 한다. 이는 개별 사건이 법칙에 나타나는 물리적 속성을 가짐으로써만 인과 관계에 편입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사건을 야기하는 데 있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개별적 심적 사건들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나, 심적 유형이나 속성은 그와 인과적으로 무관한 것이 된다. 심적 속성은 심적 사건에 대해 인과적으로 아무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심적 속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모두 물리적 사건으로 만들어도, 세계 전체의 인과적 구조는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심성 인과에 대한 논쟁에서 심적 속성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심적 '속성'의 인과적 효력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심적 실체가 제외된 후, 인과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심적 속성이다. 만약 심성이 어떤 인과적 일을 한다면, 인과적 차이는 어떤 특정한 심적 속성을 가진다는 사실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데이비드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심적 속성의 인과적 효력 및 관련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심성 인과의 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법칙적인 심적 속성이 인과적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데이비드슨의 심물 무법칙론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아니면, 심적 속성이 무법칙적일지라도 인과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대안 중 하나로, 인과에 대한 반사실적 견해가 있다. 원인이 결과가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식의 접근이다. "과제를 끝내고 싶어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 눈이 충혈됐다"라고 할 때, 눈이 충혈된 것의 원인은 당연히 과제를 끝내고 싶었던 욕구이다. 과제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면 밤을 새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눈이 충혈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심적 사건은 그것의 심적 속성에 의해 물리적 사건을 야기할 수 있다. 적절한 심물 반사실적 조건문이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사실문과 관련해서, 그것의 '의미론', 즉 반사실문이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해 많은 철학적 문제와 난점이 있다. 반사실문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법칙-도출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 세계 접근이다.

 

법칙-도출적 접근을 따르면, 심성 인과에 대한 반사실문적 접근은 심성 인과의 문제를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심물 반사실문의 참은 그것의 심리적 전건으로부터 물리적 후건의 도출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을 요구할 것이며, 이는 분명 심물 법칙을 요구한다. 따라서 심물 법칙의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

 

가능 세계 접근에서 "P였더라면, Q였을 것이다"라는 반사실문의 참은 P가 참인 실제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 세계에서 Q도 참일 때 성립된다. 이를테면, "스위치를 돌리면(P) 불이 켜졌을 것이다(Q)"라는 반사실문에 대하여, 실제 세계에서는 스위치를 돌리지도 않았고(~P) 불이 켜지지도 않았을 것이다(~Q). 이때 P가 참인 경우, 즉 스위치를 돌렸고 불이 켜진 가능 세계의 경우, 그 세계가 실제 세계와 가깝다면 반사실문의 참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심물 인과에서 심물 법칙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에 대한 규칙성의 고려가 심물 반사실문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규칙성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반사실문의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데 그것을 활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사실문을 평가할 때 이에 관여하는 법칙들은 아주 엄밀한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조건부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엄밀' 법칙은 엄밀 법칙이 없다면 인과 주장을 지지할 힘이 없는 우연한 상관관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일단 차치하고, 어려움이 모두 극복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더욱 중대한 위협은 '물리적 영역의 인과적 폐쇄성'에 관한 것이다. "물리적 사건이 원인을 갖는다면, 그것은 물리적 충분 원인을 갖는다"라는 것이다. 즉, 물리적 영역은 인과적으로 닫혀 있고, 물리적 사건을 포함한 어떠한 인과적 연쇄도 물리적인 것의 경계에서 벗어나 비물리적인 것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 영역은 설명적으로 자족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과적 폐쇄성은 모든 물리적 사건이 아닌, 물리적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주의자는 이러한 폐쇄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김재권은 다음과 같은 인과적 배제 문제를 제기한다. 심적 사건 m이 물리적 사건 p를 야기할 때, p의 충분 원인으로 m과 동시에 발생하는 물리적 원인 p* 역시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이때 심적 원인 m과 물리적 원인 p*를 동일시하거나(m=p*), p가 별개의 두 원인을 가짐으로써 인과적으로 과잉결정된다고 해야 한다.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 첫 번째 선택지는 심물 인과의 사례를 물물 인과의 사례로 만드는 환원주의적 물리주의의 일종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모든 심물 인과의 사례가 인과적 과잉결정의 사례임을, 즉 심적 원인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물리적 원인이 물리적 결과를 일으켰을 것임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이는 비직관적이며, 심적 사건의 인과적 지위를 상실시키는 것이다. 배제 원리는 "과잉결정의 사례가 아닌 한 하나의 결과가 동시에 발생하는 둘 이상의 별개의 충분 원인을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이다. (1) 심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정(mp의 원인), (2) 물리적 인과 폐쇄성에 따라 물리적 사건의 물리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p*p의 원인), (3) 심적 원인과 물리적 원인이 다르다는 가정(m≠p), (4) 이 사례가 과잉결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있을 때, (1), (2), (3)에 의해 물리적 사건이 별개의 두 원인을 가진다는 사실이 따라 나오지만, (4)로 인해 배제 원리가 작동하여 둘 중 하나는 원인에서 실격되어야 한다. 따라서, 무한 퇴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5)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아니고, (1)이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6)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을 야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제 논증에 의해 남게 되는 선택지는 둘이다. 심리-신경 동일론을 받아들이거나, 부수현상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심신 수반의 가정을 더하면, 더욱 급진적인 부수현상론의 위협이 도출된다. 심신 수반은 "x가 심적 속성 M을 예화한다면 그것은 x가 어떠한 물리적 속성 P를 예화한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이때 무엇이든 P를 가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시점에 M을 가진다"라는 의미이다. 한 심적 사건, 즉 심적 속성 M의 예화가 다른 심적 속성 M*의 예화를 야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심신 수반에 의하면, 이 경우 M*이 예화되는 것은 그것의 수반 토대 중의 하나인 어떠한 물리적 속성(P*)이 예화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경우 M*의 발생은 (i) M의 사례가 M*의 예화를 야기하기 때문이거나, (ii) M*의 수반 토대 P*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심신 수반에 따르면, P*이 발생했다면 M*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ii) 주장이 더욱 강력하다. 만약 M이 P*의 예화를 야기함으로써 M*의 예화를 야기한다면, (i)과 (ii)가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물 인과의 사례이고, 즉 심신 수반을 가정할 경우 심심 인과는 심물 인과가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배제 논증이 심물 인과를 부정했고, 수반 논증은 이를 더욱 확장시켜 심심 인과조차 심물 인과가 가능해야만 성립한다고 역설한다. 즉, 두 논증이 결합될 경우에 심적 사건은 어떤 사건도 일으키지 못하게 되며, 급진적 부수현상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환원주의적 물리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전히 동일론과 부수현상론 사이의 양자택일이 강요되는 것이다.